예금은 피상속인의 사망과 동시에 상속인들의 소유로 분할・확정됩니다. 따라서 예금에 대한 상속재산분할심판은 따로 청구할 필요가 없고 원칙적으로 청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상속인들은 곧바로 은행을 상대로 자신의 상속분에 상응하는 예금의 인출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법원의 입장입니다.
상속인과 피상속인 모두 한국인인 경우, 또는 적어도 피상속인이 한국인인 경우에는 예금을 인출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일입니다. 피상속인의 사망을 증명하는 서류와 예금인출 요청자가 한국 민법에 따른 상속인임을 입증하는 서류(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은행이 요청하는 약간의 서류(상속재산분할합의서와 위임장 등)만 작성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분이 외국 국적자인 경우에는 조금 복잡해집니다. 금융기관측에서 돌아가신 분의 본국법에 따른 유언장 검인서나 외국의 법률 문서를 가져오라면서 인출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금융기관이 위와 같은 요청을 하는 근거는 ‘상속의 준거법’ 문제와 관련됩니다. 예를 들어, 돌아가신 분이 미국 국적이면, 은행에서는 미국의 법에 따라 상속이 이루어지므로 미국법에 따른 문서와 자료를 가져오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와 같은 은행의 업무 처리는 타당할까요?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국제사법이 정하는 상속의 준거법
준거법이란 외국적 요소를 갖는 법률 사건에서 판단의 기준이 되는 법을 말합니다. 돌아가신 분이 외국 국적인 경우에는 당연히 한국의 민법을 적용하여 상속 문제를 판단하지 않고, 우선 어느 나라의 법을 적용할 것인지부터 정하게 됩니다. 그 기준은 우리나라의 경우 국제사법이 정하고 있습니다. 국제사법 제77조 제1항은 “상속은 사망 당시 피상속인의 본국법에 의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융기관은 위 국제사법 제77조를 근거로, 사망한 예금주가 외국 국적인 경우에는 본국에 해당하는 외국의 법에 따라야 하므로 (유언장이 있는 경우에는) 외국법이 정하는 유언장검인이나 (유언장이 없는 경우에는) 외국법에 따른 정당한 상속인에 해당한다는 외국의 법률 문서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국법이 거꾸로 한국법을 준거법으로 지정하는 경우 (반정)
이와 같이 금융기관이 국제사법에 따른 업무처리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은 바람직한 부분이지만, 실제 사안에 있어 잘못된 결론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즉, 국제사법 제77조가 피상속인의 본국법을 준거법으로 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본국법이란 단순히 상속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의 국제사법도 포함합니다. 따라서 본국법인 외국의 국제사법이 오히려 한국법을 준거법으로 지정하고 있는 경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한국법이 준거법이 됩니다. 이를 조금 어려운 말로 ‘반정’이라고 하고, 국제사법 제22조 제1항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참고 사례: 캐나다 국적의 피상속인이 한국에 거주하다 사망한 경우
보다 쉽게 예를 들어봅니다.
캐나다 국적의 교포 A씨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에서 한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한국의 금융기관에 예금을 남기고 사망하였습니다. 상속인으로는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 국적의 아들 X와 캐나다에 거주하는 캐나다 국적의 딸 Y가 있습니다. X와 Y는 금융기관에 예금 인출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금융기관은 국제사법에 따르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법이 준거법이 된다면서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법원의 유언검증서가 없으니 예금 인출이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경우 피상속인인 A의 국적이 캐나다이므로 국제사법 제77조에 따라 1차적으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법이 준거법이 됩니다. 그런데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유언, 유산 및 상속에 관한 법’은 상속재산 중 부동산에 대하여는 부동산 소재지의 법을, 동산에 대하여는 피상속인의 거주지의 법을 적용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금은 동산에 해당하므로 예금에 대하여는 A의 거주지인 한국의 법이 준거법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요컨대, 사안의 경우 우리나라 국제사법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법을 준거법으로 지정하였지만, 브리티시 컬럼비아주법이 다시 우리나라의 법을 준거법으로 지정하고 있으므로, 이 경우 국제사법 제22조에 따른 반정이 성립하여 한국법이 상속의 준거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융기관이 X와 Y에게 브리티시 컬럼비아주법에 따른 절차나 서류를 요청할 법적 근거가 없습니다. 금융기관은 우리 민법이 정한 바에 따라 통상의 피상속인이 한국인인 경우와 같이 업무를 처리하면 그만이고 그로써 충분합니다.
이와 같은 결론은 돌아가신 분이 캐나다 국적인 경우만이 아니라, 미국(뉴욕주, 캘리포니아주, 하와이주 등 대부분의 주), 영연합왕국과 아일랜드, 중국, 태국, 아르헨티나, 러시아, 호주, 우루과이, 인도 국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돌아가신 분이 일본, 대부분의 유럽연합 국가, 노르웨이, 브라질, 이스라엘, 칠레, 베네주엘라, 터키 등의 국적인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반정의 중요성
이와 같이 국제사법 제9조에 따른 ‘반정’은 준거법을 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측에서 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이로써 상속인들이 마음 고생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피해를 보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법률전문가인 변호사조차도 이를 확인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필자가 담당했던 사건 중에 한국으로 이주한 독일인의 상속 분쟁이 있었는데,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어느 대형 로펌 소속의 변호사는 독일 변호사의 검토까지 마쳤다면서 한국의 국제사법에 따라 피상속인의 본국법인 독일 상속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상속은 피상속인 사망 시의 상거소지의 법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반정이 인정되어 독일법이 아니라 한국법이 준거법이 되는 것이고, 그와 같이 결론을 바로잡았던 기억이 있습니다(물론 한국법을 적용하는 것이 클라이언트에게 유리했습니다).
최근에 저희 사무소가 담당했던 사건 중에는, 미국 국적의 재미교포가 한국에서 사망한 후, 미국 콜로라도 주에 거주하는 자녀들이 국내의 금융기관을 상대로 상속예금의 반환을 청구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당초 금융기관은 콜로라도 주의 상속법이 준거법이므로 그에 따른 문서와 상속인 확인이 없이는 예금 인출이 불가능하다고 하였으나, 법원은 저희 사무소의 주장을 받아들여, “미국의 국제사법에 관한 일반규정에 따르면 예금의 상속에 관하여는 피상속인이 사망 당시 거주하던 나라의 법이 적용되고, 이 사건의 피상속인은 한국에서 거주하던 중 사망하였으므로 예금의 상속에 관하여는 한국 민법이 적용된다”고 판단하면서 금융기관에게 예금과 지연손해금(연12%)의 반환을 명하였습니다.
참고로 위 사건에서는 원고들이 피상속인의 자녀가 맞다는 사실과 원고들 외에 다른 상속인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여야 할지도 문제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돌아가신 분의 가족관계등록부를 열람하면 상속인 관계가 일목요연하게 나오지만, 외국의 경우는 그와 같은 통일된 가족관계등록부 관리 체계를 갖추지 않고, 개인별로 구분하여 관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콜로라도 주도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이에 저희 사무소는 콜로라도 주와 우리나라 사이의 가족관계등록 시스템의 차이를 설명하고, 의뢰인(원고들)이 돌아가신 분의 자녀가 맞고 그 외에 다른 공동상속인(배우자나 다른 자녀)이 없다는 점을 관련 자료로써 입증하여 상속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 대처 방안
(1) 국제 상속 업무 처리 경험이 많은 변호사와의 상담
결국 금융기관측에서 피상속인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외국법에 따라야 한다거나 추가 서류를 요구하며 예금 인출에 불응하는 경우에는 우선 국제 상속에 밝은 변호사와의 상담을 통해 준거법이 무엇이고 그에 따른 필요 절차와 서류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2) 법률의견서의 제출
검토 결과 한국법이 적용되는 것으로 판정된 경우에는 은행에 그와 같은 내용을 담은 변호사 명의의 법률의견서를 제출하여 예근 인출을 요청하게 될 것입니다.
(3) 예금반환청구 소송의 제기 및 소송비용의 회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이 예금 인출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최종적인 수단으로서 법원에 예금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 판결을 받아 예금을 인출하고, 소송에 소요된 비용 또한 금융기관측으로부터 회수하는 절차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
상속인 전원 또는 일부가 외국에 거주하는 경우에는 한국의 변호사를 선임하면 귀국하지 않고 위와 같은 방법을 통해 상속 예금을 인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저희 사무소는 2008년부터 해외 거주자와 외국 국적 보유자 관련 상속 분쟁을 전문적으로 처리해 오고 있습니다. 상기 내용 기타 국제 상속과 관련된 질문이 있으신 분은 여기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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